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스티니아누스 1세 (문단 편집) == 평가 == || [[파일:1932204_orig.jpg|width=100%]] || || [[565년]]경의 [[동로마 제국]] [[영토]] || [[로마 황제|황제]]로서 [[동로마 제국|제국]]의 법령을 정비하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대규모 정복 전쟁]]을 통해 [[팍스 로마나|로마 전성기]]에 필적할 정도로 영토를 크게 늘려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정체성|으로서 정체성(identity)]]을 다시 한번 정립한 공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전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축적해 놓은 황실 예산의 대부분을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재정복 전쟁]], [[사산 왕조|페르시아]]와의 평화 조약, [[아야 소피아|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 등에 투입하여 [[세금도둑|국고를 탕진하였다는]] 비판이 역시 적지 않다. 그의 재정복 사업이 가능했던 핵심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화폐개혁]]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둬 재정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특이한 경우였지만 동서 로마 제국 간에 자주 논란을 유발시킨 [[일리리쿰]] [[속주]]에는 [[테오도시우스 2세]] 이후로는 계속 [[동로마]]가 강력한 입김을 행사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전에도 동서 로마 황제들 중 선임 황제였던 측은 대부분 일리리쿰 속주와 그 [[로마군|군대]]를 장악했던 황제들이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양아버지]]이자 [[외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도 유스티니아누스처럼 [[라틴어]]밖에 모르는 일리리쿰 속주민이었다.[* 이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와는 달리 일자무식이었던지라 [[그리스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어쨌든 유스티니아누스가 라틴어에 더 익숙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래서였는지 [[로마사]]와 [[고대 로마]] [[풍습]]에 상당한 애착을 보여서 유명무실화된 [[고대 로마|고대]]의 여러 [[관직]]이나 풍습을 살리기도 했다. 한편 라틴어에 대해서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언어'''라고 지칭했지만, 그리스어에 대해서는 마치 [[소수민족]]의 언어를 지칭하듯이 '''[[그리스인]]들의 언어'''로 지칭했다고도 한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113p, 원문 "He called '''Latin our from the fathers inherited language'''", "in contrast to '''the language of the Greeks''' or '''the common Greek language'''."] 즉, [[라틴어]]의 위상을 [[그리스어]]보다 높게 쳤던 것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때때로 '''최후의 [[로마 황제]]''' 혹은 소위 '''최후의 [[로마인]]'''으로도 불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적 수사. 유스티니아누스 이후로도 라틴어를 쓰고 일부러 [[로마 공화정|공화정기 로마]][[고대 로마의 정치제도|식 관직]]을 [[장교]]명으로 하는 황제들이 더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고대 애호가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또한 [[기독교]]를 매우 선호하는 성향을 보여 [[유대인]]들을 가끔씩 괴롭히거나 [[그리스 신화|이교도]] [[사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 [[아테네]]의 리케이온과 [[아카데미아]]를 문닫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로마적인 생활과 얼마나 융합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고대 로마|고대 제국]]의 위엄을 그리워하면서도 독실한 [[기독교인|기독교 신자]]로 사는 것이 전혀 양립 불가능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문닫게 한 조치는 일반인들을 위한 역사교양서에서 까임의 대상으로 나오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이걸 가지고 지적했으면, [[콘스탄티노폴리스|수도]]에도 대학교를 새로 세웠는데 이런 학교를 계속 존치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답했을게 분명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폐지 이유로 내세웠듯이,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는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이교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아카데미아와 콘스타티노폴리스의 국립대학은 공존하는 기간 동안 [[학자]]들 간의 상호 교류가 많았다고 사료된다.] [[사산조 페르시아]]로 [[망명]]한 [[철학자]]들도 생각보다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일자무식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스티누스 1세|삼촌]]을 도우면서 습득한 [[교양]]으로 동시대 최고의 [[지식인|교양인]]으로 불렸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군주였다. 선대의 황제들이 쌓아올린 제국 재건책을 바탕으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고토 수복]]에 나서 적은 수일지언정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등 명장들의 지휘 하에 [[병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명한 황제였다. 하지만 매우 안좋은 선례를 남긴 일로 강한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군납비리]]를 저지른 데 대한 처벌을 사형에서 벌금형으로 낮춰버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당장 제국의 몰락을 불러오지는 않았지만, 전쟁으로 고토를 수복한다는 인간이 이런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은 후대에 두고두고 비판받는 이유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